빨간색을 처음 작업에서 이야기할 때, 바다에서 다이빙하던 경험을 떠올렸다. 바닷속에서의 황홀한 경험은 처음 작품을 구상할 때 많은 영감이 되었다. 영감이라는 단어를 쓰려니 좀 낯부끄럽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바닷속에서 빨강의 빛을 몸으로 경험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바닷속은 꽤 아득하다. 물 아래로 깊이 들어가면 비로소 들리는 몸과 호흡의 소리, 물의 움직임, 공간감을 알 수 없는 깊음, 그리고 없어진 빨간색.
깊은 바다로 내려갈수록 태양 빛이 닿지 않으니, 바닷속은 빨간 빛을 잃는다. 물론 빨강을 잃은 바닷속은 과학 수업 시간을 떠 올려본다면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참 매력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빛의 진동과 파장 그리고 에너지가 드러난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평 소 우리는 알록달록 여러 색의 세상을 보지만, 실은 빨강이 우리의 망막에 닿는 첫 빛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신작 〈파이퍼〉(2024)는 진동으로서의 빛과 소리, 그리고 신호로서의 빛과 소리가 하나의 단위로 모인 상태이다. 가로세로 150cm의 크기의 유리에 반사되는 빨간빛을 기준으로 파장이 긴 낮은 소리와 파장이 긴 빨간빛이 평행하게 놓여있다. 그리고 음파와 가시광의 서로 다른 진동은 오디오 케이블과 광케이블로 연결되어 전시장의 한쪽 벽에서 얽혀 놓여있다. 참 매력적이다. 아날로그의 소리 정보는 결국 디지털 정보 가 되어 광케이블에 담겨 출력된다. 이들의 모음이 〈파이퍼〉이다. 마치한 블록의 레고와 같이, 단위 그 자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빛과 소리의 진동으로 비가시적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 그레이코드, 지인의 작품이라면 〈파이퍼〉는 첫 레이어 또는 첫 시작을 모델링하는 상태이며 플랫폼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2016년 처음 만들어진 그레이코드, 지인의 공동 작품 〈#include 레드〉를 〈파이퍼〉 작품에서 연주한 것은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에 충실하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파이퍼〉를 플랫폼으로 활용하고싶은 마음도 있어서다. 물론 멋진 왕관과 같은 작품도 전시장에 있지만, 반대로 〈파이퍼〉 같은 작품도 있지 않을까? 빛과 소리라는 당연한 물리적 사건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 주는 상태, 그 상태 자체가 작품이 되어, 또 다른 작품의 그릇이 되는 것을 상상하며 준비하였다. 마치 유리로 반사되고 투영되며 얽힘을 만들 듯 작품과 작품이 관계하는 것이었다. 연주 작품인 〈#include 레드 (파이퍼 에디션)〉는 8월 18일 오후 4시에 연주 된 후 사라졌지만, 10월 20일까지의 전시 동안 〈파이퍼〉 작품으로 이어져 있었다. 2024. 10. 07
그레이코드, 지인은 소리라는 매체 혹은 그 현상 자체의 특성과 그 여러 층위를 탐구한다. 작가들은 소리를 단순히 듣는 행위가 아니라 시청각의 스펙트럼 안에서 우리에게 다양한 예술적 시청각 경험을 제공하여 절대적 현재성을 부여하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미술관이 진동한다. 작품과 신체와 공간이 함께 울린다. 특정 주기와 간격으로 진동의 세기가 변화한다. 낮은 주파수의 소리는 심장 소리와 맞물리듯 신체에 진동과 울림으로 느껴진다. 소리는 보통 공기나 물같은 매질의 진동으로 전달되는데, 그 중 공기를 통하는 전달이 가장 늦다. 이 공간에서도 공기를 매질로 해서 소리가 전달되고 있지만 실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전시장 안에는 소리가 존재한다. 작품의 신호에 따라 유리창에 비추는 빨간색과 진동이 그 증거이다. 우리가들을 수 있는 주파수 소리는 아니지만 주파수가 낮은 소리와 빨간색으로 치환된 그 시청각의 떨림이 우리에게 울림으로 와닿는다.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느낀다.
작품이 설치된 공간 속 스피커와 여러 장치는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며 이 떨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전시 개막 당일에 나타났다 사라진 퍼포먼스의 흔적도 이 떨림에 함께 영향을 주고 있다. 시공간의 흔적과 관계가 만들어낸 떨림은 공간의 바닥과 벽, 천장 그리고 이 공간안에 있는 우리 몸의 울림으로 치환되어 우리가 이 공간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울림과 떨림을 느끼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진동이 느껴지지 않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법하다. 작품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속한 공간, 또는 이 세상 안에서 얼마나 제한적인지, 반대로 우리는 얼마나 풍부한 소리와 빛의 진동 사이에 존재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진동과 침묵 사이에서 전시장의 소음들이 들린다. 그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우리가 느꼈다고 믿게 되는 경계치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의 떨림이 느껴지다가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그 떨림 안에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이 공간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글. 김선영(경기도미술관)